[歷史칼럼]금남로와 정충신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8/05/1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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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는 민주항쟁의 격전지 금남로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카톨릭센터(지금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를 중심으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했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금남로의 유래에 대하여 잘 모른다. 충장로가 충장공 김덕령을 기리는 도로라는 것은 알지만, 금남로가 금남군(錦南君) 정충신(1576∼1636)에서 유래되었음은 모른다. 심지어 충장로 입구에는 김덕령 관련 동판이 있지만, 금남로에는 정충신의 흔적이 아예 없다.

 

정충신은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9대손으로 광주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주향청의 좌수이고 어머니는 여종이었다. 

 

향청에서 사환으로 일한 정충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1592년 7월8일에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금산 근처의 이치 전투에서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을 물리쳤다. 육전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이 승전보를 16세의 정충신이 의주에 알렸다. 그는 장계를 노끈으로 꼬아 괴나리봇짐으로 만들어 등에 지고 거지 행세를 하며 2천리 길을 걸어 권율의 사위 이항복(1556∼1618)에게 전했다. 병조판서 이항복은 기뻐하며 선조에게 승전보를 전했고 권율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항복은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고 자기 집에서 공부를 가르쳤고, 정충신은 곧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충신은 1608년에 조산보 만호로 근무했고 1617년에는 회답사겸쇄환사 오윤겸의 수행군관으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 321명을 데려 왔다. 이때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손자 양천경의 가족 4명도 함께 돌아왔다. 이는 종사관 이경직의 ‘부상록’에 기록되어 있다.

 

1618년(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한 이항복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갔다. 철령을 넘으면서 백사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뿌려본들 어떠하리.

 

정충신은 그의 유배지를 따라가 정성으로 모셨고 이항복이 죽자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포천 선영에 모셨다. 『백사북천일록』에 나온다.

 

1621년에 정충신은 만포첨사로 임명되었고, 심하전투에서 포로가 된 병력을 쇄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외교적 수완을 보여 포로를 데려왔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정권은 무너졌고, 논공행상에 불만은 품은 이괄은 1624년에 난을 일으켰다. 인조는 공주로 피신했고 이괄은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때 정충신은 이괄을 서울 안현전투에서 무찔러 큰 공을 세웠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졌다. 

 

1633년 2월에 정충신은 후금의 세폐(歲幣)증액 요구에 반대하여 후금과 국교 단절하러 가는 사신 김대건을 잡아두고, 후금의 요구를 들어주어 전쟁은 막아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인조의 분노를 사서 충청도 당진으로 유배 갔다.(인조실록 1633년 2월11일) 하지만, 정충신은 곧 풀려나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5월에 정충신이 별세했고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1637년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송파의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굴욕을 겪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50만 명이 넘은 조선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환향녀(還鄕女)’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인조가 1644년에 망한 명나라에 매달리지 않고 정충신의 실리 외교 전략에 조금만 귀 기울였어도 백성들의 수난이 덜하였을 것이다. 임금이 무능하면 백성이 힘들다.  
   
한마디로 정충신은 천출(賤出)이지만 입지전적 인물이었고 시호는 이순신처럼 충무공이다. 

  

광주공원의 ‘충장공 도원수 권율장군 창의비’에는 정충신의 이름이 적혀있고, 사직공원 입구에는 정충신의 시비(詩碑)가 있다.

 

공산(空山)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아
촉국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한편, 충남 서산시 지곡면에는 정충신을 모신 진충사(振忠祠)와 묘소가 있다. 

1월부터 남도일보가 역사소설 ‘깃발’을 연재하여 금남군 정충신을 재조명하고 있다. 크게 축하할 일이다. 이를 계기로 남도일보 앞에 ‘금남로의 유래’ 표시판이라도 세워 정충신을 기리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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