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 위의 호남 선비 -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 (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8/03/12 [19:56]

 

▲     © 뉴스24


이제 윤선도(1587∼1671)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 그의 유년기는 특이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해남윤씨 가문은 윤선도가 3살 때인 1589년에  정여립 사건으로 큰 화를 입었다.

 

10월2일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이 선조에게 비밀장계를 올렸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급파했는데 정여립은 전라도에 있었다. 10월17일에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에서 자결했다.

 

그런데 10월28일에 전라도 창평의 생원 양천회가 이발 · 이길 · 정언신 등이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11월4일에는 예조 정랑 백유함이 입경하여 숙배한 뒤에 소를 올려 김우옹·이발·이길 등이 역적과 친밀하다고 하였다. 이발·이길 형제는 윤구(윤선도의 증조부)의 외손자로서 부친은 전라도 관찰사를 한 이중호이다. 특히 대사간 이발(1544∼1589)은 동인의 실세였다.

 

11월8일에 선조는 우의정 정언신을 파직하고 서인의 영수 정철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위관(수사책임관)을 맡겼다. 이 날 선조는 성혼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정철은 정언신과 이발·이길 등을 국문했다. 그리하여 정언신은 강계, 이발은 종성, 이길은 희천으로 유배를 갔다.  이어서 12월12일에 낙안유생 선홍복이 끌려와서 ‘정여립이 상중에 있던 이발을 찾아왔다’는 말을 하자 이발 · 이길 형제는 다시 끌려와 혹독한 고문으로 죽었다.1)

 

심지어 80세의 노모 해남 윤씨도 무릎을 으깨는 압슬형을 당하여 죽었고 8세의 아들마저 고문으로 죽었다. 이 사건은 의금부의 나졸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괘일록(掛一錄)』에서 전했다. 백성들의 원망도 컸다.

아무리 반역을 했을 지라도 80세 이상의 노모와 10세 이하의 아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는 경우는 없었다. 1456년에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세조가 사육신 등 70여명을 반역죄로 처벌할 때에도 10세 이하

남자와 부녀자는 국문하지 않았다. (세조실록 1456년 6월5일)이 비극적이고 반인륜적 옥사는 두고두고 정치 쟁점이 되었다. 서인측은 1591년 5월에 옥사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동인측은 무슨 소리냐며 1590년에 옥사가 있었다고 주장하여 정쟁(政爭)은 수 백 년 이어졌다.
  
1902년에 매천 황현은 나주시 남평 오현당(五賢堂)을 지나면서 이발과 이길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당시에도 이발 노모와 아들들에 대한 옥사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듯한  표현이 있다.

송강과 서애 중 누가 은인이고 원수인가 하는 말들 야사는 흐릿하여 태반이 거짓일세.

 

지금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박시백은 20개월 후 옥사가 마무리 될 즈음에 선조가 이발 노모와 아들들을 국문하라고 명하여 이들이 죽었다고 적었고 (서인 입장),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은 ‘정철, 기축옥사 특검 되던 날’에서 이발 노모와 아들의 옥사에 정철이 있었다고 했다.(동인 입장) 2)

 

또한 이덕일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2009년)’에서 김장생이 1621년에 지은 ‘송강 정철 행록’에서 이 사건을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웠고, 오항녕은 ‘유성룡인가 정철인가(2015년)’에서 정철은 오해받은 행동을 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오해를 받은 분으로, 유성룡은 오해받을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오해를 받는 분으로 평가했다. 

 

필자가 보기는 서인이 1657년(효종 8)에 편찬한 1591년 5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의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발의 어머니 윤씨와 그의 아들들을 고문으로 죽였다. 이발과 이길의 가속이 옥에 연루된 지 2년이었다. 대신이 미봉책으로 형국을 면하게 하였지만 석방시키자고 청하지는 못했다. 이때에 옥사를 이미 완결시켰으나 이발의 가속에 대해서만은 미결된 상태였는데, 모두 형신하며 국문하라고 상(선조)이 명했다.

 

윤씨는 82세였고 이발의 아들 이명철은 10세였다. 우의정 이양원이 추국청을 감독하면서 늙은이와 어린아이에게 는 형벌을 실시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서인은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의 옥사를 선조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선조가 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발 가족을 국문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이 기록이 ‘송강 정철 구하기’가 아니길 빈다.         

 

아무튼 이발 집안의 멸문과 8순의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들의 옥사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1) 이발의 옥사가 선조실록(북인이 1616년에 편찬)과 선조수정실록에 모두 실린 것은 이례적이다. (선조실록 1589년 12월12일, 선조수정실록 1589년 12월1일.)

2)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휴머니스트, 2007, p 76-77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3, 민음사, 2015, p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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