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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호남 선비-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 (5) - 수군개혁을 상소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기사입력  2017/07/10 [10:12]
송흠(1459∼1547)은 관수정에서 유유자적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삶에서도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1544년 4월에 경남 통영의 사량진에서 왜변이 일어났다. 1)  이에 조정은 일본과 단교하였다. 중국의 해적들도 수시로 해안을 침범하여 도적질을 일삼았다.

송흠은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보성군수·장흥부사 등 포구 지역의 수장을 한 경륜으로 수군개혁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면 1544년(중종 39년) 9월8일자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중국과 일본을 경계하도록 청하는 송흠의 상소’를  살펴보자.  
 
송흠의 상소를 승정원에 내리고 이르기를, “이 소를 보니, 먼 앞날까지  염려한 것이 지당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늘 적을 깔보는 마음이 있다. (중략) 바야흐로 왜노를 거절하는 때이고 서해안도 걱정이니 미리 조치해야 할 때이다. 당선(唐船)·왜선(倭船)이 와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거든 바다 가운데에서 만나더라도 도적의 배로 여겨 잡으라고 각도에 하유하라.” 하였다.

그 소는 다음과 같다.

“신(臣)은 나이가 86세이므로 정신과 기력이 날로 쇠약해져서 세상에 뜻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보고 차마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이므로 군정(軍政)이 해이하여, 변장(邊將)이 된 자는 안일에 젖어 헛된 이름만 있을 뿐, 방어하는 일에 무관심하니, 신(臣)이 탄식하는 바입니다.
이제 듣건대, 변장이 여러 번 중국 배한테 욕보았다 합니다. (중략) 또 듣건대 그 배는 단단하기가 여느 것과 달라서 사면에 다 널빤지로 집을 만들고 또 가운데가 넓어서 1백여 인을 포용할 만하며 그 밖의 병기도 잘 정비되어, 대적할 자가 없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것과 달라서, 전함을 갖춘 것이 별로 없고, 공사(公私)의 배가 많이 있기는 하나 거의 다 좁고 허술하며, 또 화포는 오래되고 화약의 힘은 미약하여, 저 중국 사람의 화포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입니다. 이러니 적을 만나 반드시 지는 것입니다.
(중략) 지금의 계책으로는,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서  전함을 만들게 하되, 반드시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모두 당인(唐人)의 배와 같이 해야 합니다. 또 화포· 궁전(弓箭)·창검 따위 물건도 해마다 단련하고 달마다 단련한다면, 적선을 만나더라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기계만 있고 장수는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얻는 것이 첫째이고 기계는 다음입니다. 이제부터 병사 · 수사와 연변의 수령·만호 등을 다 장수 될 만 한 자를 가려서 맡기기를 바랍니다. (중략)
행여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늙은 자의 말이라 여기지 않고 시험하신다면, 밖으로 적을 물리치는 방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입니다.”

상소의 요지는 개국 이래 15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여 군정이 해이해졌고, 변방의 장수들은 안일에 젖었으며, 변장들이 중국의 해적들에게 욕보았어도 속수무책임을 한탄하면서 중국 해적과 왜구의 침략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리하여 송흠은  첫째 중국의 당선(唐船)처럼 대형 전함을 만들 것, 둘째 무기와 화포 등을 개량할 것, 셋째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을 수군개혁론으로 건의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수군 전함을 중국의 당선처럼 만들라는 건의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배는 쾌선과 맹선이었다. 이 배들은 전투 전용이 아니라 조운을 겸한 소형배였다. 이런 배를 가지고 적과 싸웠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중국의 당선(唐船)처럼 판옥선을 만들라는 송흠의 건의는 1544년 12월 중종의 승하로 중단되었지만 송흠이 별세한 지 8년만인 1555년(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2), 조정은 송흠의 상소문을 검토하여 판옥선을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이었다.

1) 왜선 20척에 승선한 200여명의 왜적이 사량진을  쳐들어와서   수군 1명을 죽이고 10여 명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2) 을묘왜변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척으로 전라도 해남 · 영암 · 장흥 · 강진 일대를 일시에 침입한 사건이다. 이 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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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0 [10:12]  최종편집: ⓒ 뉴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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