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학산책] 고문서와 옛편지 서른 아홉 번째 이야기

뉴스24 | 입력 : 2020/12/10 [12:56]

너무 마음이 아파 기록한다,『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순암책력일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안정복일기』라는 제목의 자료가 64책이나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자료들은 모두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암 안정복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책력에 쓴 메모 일기와 순암가에서 초록하고 수집한 자료의 일부이다. 처음 도서관에서 구입하여 들여올 때에 붙인 이름이다. 64책 속에는 순암이 책력에 쓴 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순암책력일기』라고 이름 붙인다.

그림1

『순암책력일기』

이기경(李基慶, 1756~1819)와 그의 5대손 이만채(李晩采)가 이어서 편찬한 『벽위편(闢衛編)』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편에는 ‘안 순암 을사일기(安順庵乙巳日記)’라는 항목이 있다. 또 거기에는 ‘1784년 권철신과 사흥에게 보내는 편지[甲辰與權哲身兼呈士興書]’ 라고 하여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도 인용하고 있다. 『벽위편』이 간행된 양근 일대는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과 그의 형 철신이 살던 곳이고 이기양의 광주 이씨들도 그곳에 세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도입기에 신서(信西)와 벽서(闢西)가 첨예하게 부딪치던 곳이었다. 벽서파이던 이기경을 염두에 둔다면 순암의 일기나 편지가 이기경의 기록에 인용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소개할 안정복 책력 일기 이면에 기록된 ‘이기양 관련 메모’는 ‘추조적발사건’이라는 전례 없는 공안 정국 하에 신서와 벽서가 어떻게 갈등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림2

『벽위편』

『순암책력일기』 을사년(1785, 정조9) 10월 10일자의 이면(裏面)에는 4쪽에 걸쳐서 문의 현령으로 재임 중이던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이 안정복을 방문하여 격렬하게 항의하고 돌아간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글의 마지막에는 “이기양이 돌아간 후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쓴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인가?(士興歸後 痛心而書之 吾儕之至於如此 亦天意也 奈何)”고 하였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잊지 않으려고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둔 것이다. 이기양의 하늘과 안정복의 하늘은 다른 하늘인가보다.

 

<책력 일기의 이면, 순암의 메모>

 

4쪽에 걸친 그날의 기록을 그대로 다 옮기기에는 너무 길다.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이기양이 안정복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10월 9일 양지 현감이 와서 곧 이기양이 갈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오랜만에 제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정복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가동이 와서 관인의 행차가 왔다고 전하기에 그는 그것이 이기양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바깥채에 나갔더니 과연 관인의 행차가 들어오는데 마을에 권마성이 진동하고 가마가 바로 집 뜨락 앞에까지 왔는데 한 관장이 가마에 타고서 들어왔다.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길 마당에서 맞이하기에는 체면이 안 되었기에 피하여 안채로 들어갔다. 이기양이 바깥채에 조금 있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서로 안부를 묻고 좌정하였다.

그림3

『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사돈이기도 하고 사제 관계이기도 한 이기양이 오랜 만에 온다는 전언을 친구인 양지 현감 유순에게서 들었는데, 이튿날 그가 양근을 거쳐서 광주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등장 자체가 그전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시끄러울 정도의 권마성을 울리며 마을에 들어와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고 순암에 들어온 것이다. 순암이 당황할 정도의 자세여서 비례(非禮)를 피하기 위하여 순암은 안채로 피하여 들어간다.

다음 단락은 본격적인 쟁변(爭辯)이다. 그는 순암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 불평하는 말이 있다는 것, 또 편지 중에 ‘문의 언찰(文義諺札)’ 네 글자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어머니 편지인데 왜 그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느냐고 항의하였다. 이기양의 기색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지만 안정복은 웃으면서 “이 네 글자는 다른 게 아니네. 우리 집과 그대와 권철신의 집은 바로 한 집안이네. 권철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네 집 언찰을 언급하는 게 무슨 죄인가.” 라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이기양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 언찰을 손님들에게 일일이 보여주십니까?” 하고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안정복은 “사돈 집 언찰을 어찌 바깥사람에게 보이겠는가?” 하고 손님들에게 언찰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그럼에도 이기양은 “일을 이처럼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강경하게 말하자, 안정복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노인이 조급하고 노망해서 그런 것이니 어찌 심하게 허물할 게 있는가?”하고 변명하였다. 그렇게까지 변명을 해도 이기양은 “이는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라고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안정복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속으로는 불복하였지만 겉으로는 사과하여 그 자리를 무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평소에 안정복이 이기양 자신을 책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본격적으로 도전해왔다. 그에 대해서도 안정복은 자신이 원래부터 자제나 비복들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꾸짖은 바도 없고 하물며 이기양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꾸짖을 리가 있는가 라고 변명하였다. 더 나아가 이기양은 안정복이 세자시강원에 벼슬을 할 때에 서울의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걸어서 서울까지 들어가 여론 조성에 애썼는데, 선생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옛날에 했던 일을 제 입으로 자신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이에 안정복은 그러한 말은 노복이나 겸종배들이 공치사하며 상을 바랄 때에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하며 한심함을 느꼈다.

언찰을 둘러싸고 한차례 격렬하게 부딪쳤던 둘은 두 사람 사이의 열을 식히기 위하여 순암이 이기양에게 술을 권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기양은 마지못해 몇 잔 권하다가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 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하게 경고한 것에 대하여 ‘화심(禍心)’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였다. 이기양은 사람들이 순암이 ‘화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순암은 서학(西學)은 선비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였지만, 자신의 사위인 권일신과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 동생 이기성이 형조에 잡혀간 것을 지적하면서 서학은 반대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사위와 손녀사위를 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잘 알다시피 ‘추조적발사건’이란 1785년(정조 9) 봄에 형조(刑曹, 秋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 집회를 적발한 사건을 말한다.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등과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가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적발된 사건이다. 이때 이승훈, 정약전 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체포되어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과연 순암이 서학을 하는 이들을 형조에 고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고발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벽서(闢西) 문제를 지인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고발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순암은 이기양이 자기를 찾아오면서 마을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고 마당에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온 것에서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심지어는 그것을 그들이 천주학을 하여 그러한 예의를 취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이 변했음을 개탄하였다.

 

<‘문의 언찰’과 ‘화심(禍心)’>

 

이기양의 광주 이씨와 권철신, 권일신의 안동 권씨, 안정복의 광주 안씨, 이가환의 여주 이씨는 한 집안처럼 얽혀있다. 이기양과 권철신, 이가환은 이기양의 큰아들 이총억과 권철신의 딸이 결혼하고,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은 안정복의 손녀와 결혼함으로써 사돈이 되었다. 또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은 잘 알다시피 안정복의 사위이다. 이렇게 안동 권씨, 광주 이씨, 광주 안씨는 겹겹이 얽혀있어 순암이 말하듯이 한 집안과 같은 사이였다.

 

<표> 광주 이씨, 광주 안씨, 안동 권씨의 통혼 관계

그림4

‘문의 언찰’이란 이기양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언찰이다. 이기양이 당시에 문의 현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의 언찰’이라고 한 것이다.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이기양의 어머니 언찰에는 자신의 손자인 총억과 방억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칭송하고 자신의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도 천주교를 권면한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은 손녀에게 온 시어머니의 언찰을 주변 인물들에게 공개하며 자신의 주변에 서학, 천학(天學)이 광범하게 유포되어 유럽의 사옥(邪獄)이나 일본의 천주교 박해 사건 등의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여 마지않았다. 이기양은 이를 ‘화심’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양근을 거쳐 텃골 순암에게 와서 강경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이기양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안정복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그러나 순암이 서학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서학고」나 「서학문답」을 통하여 서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벽서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이기양이 순암에게 항의한 것은 언찰을 공개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기양은 순암이 자신을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고 경계하는 말만 했으며, 순암이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할 때에 주변에서 말이 많을 때에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애쓴 것에 대해서 순암이 알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섭섭함을 토로하였다. 순암은 문의 언찰 문제에 대해서 항의하였을 때에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술이나 권하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세자시강원에 벼슬할 때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에는 속으로 소인배들처럼 공치사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나아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마을을 짓쳐들어와 뜰 안에까지 와서 가마에서 내린 무례함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천주교의 예절인가 하고 비난하였다.

순암으로서는 자신과 그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이기양의 아버지 이종한(李宗漢)이 자신을 존장(尊丈)으로 대했으며, 이기양은 자신의 아들인 안경증(安景曾)과 교제하는 사이이고, 이기양도 순암 자신을 스승으로 대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세상이 크게 변하였다고 개탄하였다. 순암 안정복의 하늘과 복암 이기양의 하늘은 다른 하늘이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너무 마음이 아파 기록한다,『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순암책력일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안정복일기』라는 제목의 자료가 64책이나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자료들은 모두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암 안정복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책력에 쓴 메모 일기와 순암가에서 초록하고 수집한 자료의 일부이다. 처음 도서관에서 구입하여 들여올 때에 붙인 이름이다. 64책 속에는 순암이 책력에 쓴 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순암책력일기』라고 이름 붙인다.

그림1

『순암책력일기』

이기경(李基慶, 1756~1819)와 그의 5대손 이만채(李晩采)가 이어서 편찬한 『벽위편(闢衛編)』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편에는 ‘안 순암 을사일기(安順庵乙巳日記)’라는 항목이 있다. 또 거기에는 ‘1784년 권철신과 사흥에게 보내는 편지[甲辰與權哲身兼呈士興書]’ 라고 하여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도 인용하고 있다. 『벽위편』이 간행된 양근 일대는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과 그의 형 철신이 살던 곳이고 이기양의 광주 이씨들도 그곳에 세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도입기에 신서(信西)와 벽서(闢西)가 첨예하게 부딪치던 곳이었다. 벽서파이던 이기경을 염두에 둔다면 순암의 일기나 편지가 이기경의 기록에 인용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소개할 안정복 책력 일기 이면에 기록된 ‘이기양 관련 메모’는 ‘추조적발사건’이라는 전례 없는 공안 정국 하에 신서와 벽서가 어떻게 갈등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림2

『벽위편』

『순암책력일기』 을사년(1785, 정조9) 10월 10일자의 이면(裏面)에는 4쪽에 걸쳐서 문의 현령으로 재임 중이던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이 안정복을 방문하여 격렬하게 항의하고 돌아간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글의 마지막에는 “이기양이 돌아간 후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쓴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인가?(士興歸後 痛心而書之 吾儕之至於如此 亦天意也 奈何)”고 하였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잊지 않으려고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둔 것이다. 이기양의 하늘과 안정복의 하늘은 다른 하늘인가보다.

 

<책력 일기의 이면, 순암의 메모>

 

4쪽에 걸친 그날의 기록을 그대로 다 옮기기에는 너무 길다.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이기양이 안정복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10월 9일 양지 현감이 와서 곧 이기양이 갈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오랜만에 제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정복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가동이 와서 관인의 행차가 왔다고 전하기에 그는 그것이 이기양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바깥채에 나갔더니 과연 관인의 행차가 들어오는데 마을에 권마성이 진동하고 가마가 바로 집 뜨락 앞에까지 왔는데 한 관장이 가마에 타고서 들어왔다.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길 마당에서 맞이하기에는 체면이 안 되었기에 피하여 안채로 들어갔다. 이기양이 바깥채에 조금 있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서로 안부를 묻고 좌정하였다.

그림3

『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사돈이기도 하고 사제 관계이기도 한 이기양이 오랜 만에 온다는 전언을 친구인 양지 현감 유순에게서 들었는데, 이튿날 그가 양근을 거쳐서 광주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등장 자체가 그전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시끄러울 정도의 권마성을 울리며 마을에 들어와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고 순암에 들어온 것이다. 순암이 당황할 정도의 자세여서 비례(非禮)를 피하기 위하여 순암은 안채로 피하여 들어간다.

다음 단락은 본격적인 쟁변(爭辯)이다. 그는 순암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 불평하는 말이 있다는 것, 또 편지 중에 ‘문의 언찰(文義諺札)’ 네 글자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어머니 편지인데 왜 그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느냐고 항의하였다. 이기양의 기색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지만 안정복은 웃으면서 “이 네 글자는 다른 게 아니네. 우리 집과 그대와 권철신의 집은 바로 한 집안이네. 권철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네 집 언찰을 언급하는 게 무슨 죄인가.” 라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이기양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 언찰을 손님들에게 일일이 보여주십니까?” 하고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안정복은 “사돈 집 언찰을 어찌 바깥사람에게 보이겠는가?” 하고 손님들에게 언찰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그럼에도 이기양은 “일을 이처럼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강경하게 말하자, 안정복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노인이 조급하고 노망해서 그런 것이니 어찌 심하게 허물할 게 있는가?”하고 변명하였다. 그렇게까지 변명을 해도 이기양은 “이는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라고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안정복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속으로는 불복하였지만 겉으로는 사과하여 그 자리를 무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평소에 안정복이 이기양 자신을 책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본격적으로 도전해왔다. 그에 대해서도 안정복은 자신이 원래부터 자제나 비복들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꾸짖은 바도 없고 하물며 이기양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꾸짖을 리가 있는가 라고 변명하였다. 더 나아가 이기양은 안정복이 세자시강원에 벼슬을 할 때에 서울의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걸어서 서울까지 들어가 여론 조성에 애썼는데, 선생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옛날에 했던 일을 제 입으로 자신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이에 안정복은 그러한 말은 노복이나 겸종배들이 공치사하며 상을 바랄 때에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하며 한심함을 느꼈다.

언찰을 둘러싸고 한차례 격렬하게 부딪쳤던 둘은 두 사람 사이의 열을 식히기 위하여 순암이 이기양에게 술을 권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기양은 마지못해 몇 잔 권하다가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 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하게 경고한 것에 대하여 ‘화심(禍心)’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였다. 이기양은 사람들이 순암이 ‘화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순암은 서학(西學)은 선비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였지만, 자신의 사위인 권일신과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 동생 이기성이 형조에 잡혀간 것을 지적하면서 서학은 반대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사위와 손녀사위를 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잘 알다시피 ‘추조적발사건’이란 1785년(정조 9) 봄에 형조(刑曹, 秋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 집회를 적발한 사건을 말한다.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등과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가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적발된 사건이다. 이때 이승훈, 정약전 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체포되어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과연 순암이 서학을 하는 이들을 형조에 고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고발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벽서(闢西) 문제를 지인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고발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순암은 이기양이 자기를 찾아오면서 마을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고 마당에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온 것에서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심지어는 그것을 그들이 천주학을 하여 그러한 예의를 취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이 변했음을 개탄하였다.

 

<‘문의 언찰’과 ‘화심(禍心)’>

 

이기양의 광주 이씨와 권철신, 권일신의 안동 권씨, 안정복의 광주 안씨, 이가환의 여주 이씨는 한 집안처럼 얽혀있다. 이기양과 권철신, 이가환은 이기양의 큰아들 이총억과 권철신의 딸이 결혼하고,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은 안정복의 손녀와 결혼함으로써 사돈이 되었다. 또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은 잘 알다시피 안정복의 사위이다. 이렇게 안동 권씨, 광주 이씨, 광주 안씨는 겹겹이 얽혀있어 순암이 말하듯이 한 집안과 같은 사이였다.

 

<표> 광주 이씨, 광주 안씨, 안동 권씨의 통혼 관계

그림4

‘문의 언찰’이란 이기양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언찰이다. 이기양이 당시에 문의 현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의 언찰’이라고 한 것이다.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이기양의 어머니 언찰에는 자신의 손자인 총억과 방억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칭송하고 자신의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도 천주교를 권면한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은 손녀에게 온 시어머니의 언찰을 주변 인물들에게 공개하며 자신의 주변에 서학, 천학(天學)이 광범하게 유포되어 유럽의 사옥(邪獄)이나 일본의 천주교 박해 사건 등의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여 마지않았다. 이기양은 이를 ‘화심’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양근을 거쳐 텃골 순암에게 와서 강경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이기양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안정복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그러나 순암이 서학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서학고」나 「서학문답」을 통하여 서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벽서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이기양이 순암에게 항의한 것은 언찰을 공개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기양은 순암이 자신을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고 경계하는 말만 했으며, 순암이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할 때에 주변에서 말이 많을 때에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애쓴 것에 대해서 순암이 알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섭섭함을 토로하였다. 순암은 문의 언찰 문제에 대해서 항의하였을 때에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술이나 권하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세자시강원에 벼슬할 때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에는 속으로 소인배들처럼 공치사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나아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마을을 짓쳐들어와 뜰 안에까지 와서 가마에서 내린 무례함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천주교의 예절인가 하고 비난하였다.

순암으로서는 자신과 그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이기양의 아버지 이종한(李宗漢)이 자신을 존장(尊丈)으로 대했으며, 이기양은 자신의 아들인 안경증(安景曾)과 교제하는 사이이고, 이기양도 순암 자신을 스승으로 대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세상이 크게 변하였다고 개탄하였다. 순암 안정복의 하늘과 복암 이기양의 하늘은 다른 하늘이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너무 마음이 아파 기록한다,『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순암책력일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안정복일기』라는 제목의 자료가 64책이나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자료들은 모두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암 안정복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책력에 쓴 메모 일기와 순암가에서 초록하고 수집한 자료의 일부이다. 처음 도서관에서 구입하여 들여올 때에 붙인 이름이다. 64책 속에는 순암이 책력에 쓴 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순암책력일기』라고 이름 붙인다.

그림1

『순암책력일기』

이기경(李基慶, 1756~1819)와 그의 5대손 이만채(李晩采)가 이어서 편찬한 『벽위편(闢衛編)』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편에는 ‘안 순암 을사일기(安順庵乙巳日記)’라는 항목이 있다. 또 거기에는 ‘1784년 권철신과 사흥에게 보내는 편지[甲辰與權哲身兼呈士興書]’ 라고 하여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도 인용하고 있다. 『벽위편』이 간행된 양근 일대는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과 그의 형 철신이 살던 곳이고 이기양의 광주 이씨들도 그곳에 세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도입기에 신서(信西)와 벽서(闢西)가 첨예하게 부딪치던 곳이었다. 벽서파이던 이기경을 염두에 둔다면 순암의 일기나 편지가 이기경의 기록에 인용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소개할 안정복 책력 일기 이면에 기록된 ‘이기양 관련 메모’는 ‘추조적발사건’이라는 전례 없는 공안 정국 하에 신서와 벽서가 어떻게 갈등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림2

『벽위편』

『순암책력일기』 을사년(1785, 정조9) 10월 10일자의 이면(裏面)에는 4쪽에 걸쳐서 문의 현령으로 재임 중이던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이 안정복을 방문하여 격렬하게 항의하고 돌아간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글의 마지막에는 “이기양이 돌아간 후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쓴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인가?(士興歸後 痛心而書之 吾儕之至於如此 亦天意也 奈何)”고 하였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잊지 않으려고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둔 것이다. 이기양의 하늘과 안정복의 하늘은 다른 하늘인가보다.

 

<책력 일기의 이면, 순암의 메모>

 

4쪽에 걸친 그날의 기록을 그대로 다 옮기기에는 너무 길다.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이기양이 안정복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10월 9일 양지 현감이 와서 곧 이기양이 갈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오랜만에 제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정복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가동이 와서 관인의 행차가 왔다고 전하기에 그는 그것이 이기양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바깥채에 나갔더니 과연 관인의 행차가 들어오는데 마을에 권마성이 진동하고 가마가 바로 집 뜨락 앞에까지 왔는데 한 관장이 가마에 타고서 들어왔다.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길 마당에서 맞이하기에는 체면이 안 되었기에 피하여 안채로 들어갔다. 이기양이 바깥채에 조금 있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서로 안부를 묻고 좌정하였다.

그림3

『순암책력일기』의 이면

사돈이기도 하고 사제 관계이기도 한 이기양이 오랜 만에 온다는 전언을 친구인 양지 현감 유순에게서 들었는데, 이튿날 그가 양근을 거쳐서 광주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등장 자체가 그전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시끄러울 정도의 권마성을 울리며 마을에 들어와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고 순암에 들어온 것이다. 순암이 당황할 정도의 자세여서 비례(非禮)를 피하기 위하여 순암은 안채로 피하여 들어간다.

다음 단락은 본격적인 쟁변(爭辯)이다. 그는 순암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 불평하는 말이 있다는 것, 또 편지 중에 ‘문의 언찰(文義諺札)’ 네 글자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어머니 편지인데 왜 그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느냐고 항의하였다. 이기양의 기색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지만 안정복은 웃으면서 “이 네 글자는 다른 게 아니네. 우리 집과 그대와 권철신의 집은 바로 한 집안이네. 권철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네 집 언찰을 언급하는 게 무슨 죄인가.” 라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이기양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 언찰을 손님들에게 일일이 보여주십니까?” 하고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안정복은 “사돈 집 언찰을 어찌 바깥사람에게 보이겠는가?” 하고 손님들에게 언찰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그럼에도 이기양은 “일을 이처럼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강경하게 말하자, 안정복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노인이 조급하고 노망해서 그런 것이니 어찌 심하게 허물할 게 있는가?”하고 변명하였다. 그렇게까지 변명을 해도 이기양은 “이는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라고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안정복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속으로는 불복하였지만 겉으로는 사과하여 그 자리를 무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평소에 안정복이 이기양 자신을 책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본격적으로 도전해왔다. 그에 대해서도 안정복은 자신이 원래부터 자제나 비복들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꾸짖은 바도 없고 하물며 이기양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꾸짖을 리가 있는가 라고 변명하였다. 더 나아가 이기양은 안정복이 세자시강원에 벼슬을 할 때에 서울의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걸어서 서울까지 들어가 여론 조성에 애썼는데, 선생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옛날에 했던 일을 제 입으로 자신의 공로를 언급하였다. 이에 안정복은 그러한 말은 노복이나 겸종배들이 공치사하며 상을 바랄 때에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하며 한심함을 느꼈다.

언찰을 둘러싸고 한차례 격렬하게 부딪쳤던 둘은 두 사람 사이의 열을 식히기 위하여 순암이 이기양에게 술을 권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기양은 마지못해 몇 잔 권하다가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 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하게 경고한 것에 대하여 ‘화심(禍心)’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였다. 이기양은 사람들이 순암이 ‘화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순암은 서학(西學)은 선비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였지만, 자신의 사위인 권일신과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 동생 이기성이 형조에 잡혀간 것을 지적하면서 서학은 반대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사위와 손녀사위를 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잘 알다시피 ‘추조적발사건’이란 1785년(정조 9) 봄에 형조(刑曹, 秋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 집회를 적발한 사건을 말한다.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등과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가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적발된 사건이다. 이때 이승훈, 정약전 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체포되어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과연 순암이 서학을 하는 이들을 형조에 고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고발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벽서(闢西) 문제를 지인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고발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순암은 이기양이 자기를 찾아오면서 마을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고 마당에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온 것에서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심지어는 그것을 그들이 천주학을 하여 그러한 예의를 취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이 변했음을 개탄하였다.

 

<‘문의 언찰’과 ‘화심(禍心)’>

 

이기양의 광주 이씨와 권철신, 권일신의 안동 권씨, 안정복의 광주 안씨, 이가환의 여주 이씨는 한 집안처럼 얽혀있다. 이기양과 권철신, 이가환은 이기양의 큰아들 이총억과 권철신의 딸이 결혼하고,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은 안정복의 손녀와 결혼함으로써 사돈이 되었다. 또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은 잘 알다시피 안정복의 사위이다. 이렇게 안동 권씨, 광주 이씨, 광주 안씨는 겹겹이 얽혀있어 순암이 말하듯이 한 집안과 같은 사이였다.

 

<표> 광주 이씨, 광주 안씨, 안동 권씨의 통혼 관계

그림4

‘문의 언찰’이란 이기양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언찰이다. 이기양이 당시에 문의 현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의 언찰’이라고 한 것이다.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이기양의 어머니 언찰에는 자신의 손자인 총억과 방억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칭송하고 자신의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도 천주교를 권면한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은 손녀에게 온 시어머니의 언찰을 주변 인물들에게 공개하며 자신의 주변에 서학, 천학(天學)이 광범하게 유포되어 유럽의 사옥(邪獄)이나 일본의 천주교 박해 사건 등의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여 마지않았다. 이기양은 이를 ‘화심’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양근을 거쳐 텃골 순암에게 와서 강경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이기양 어머니의 언찰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안정복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그러나 순암이 서학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서학고」나 「서학문답」을 통하여 서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벽서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이기양이 순암에게 항의한 것은 언찰을 공개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기양은 순암이 자신을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고 경계하는 말만 했으며, 순암이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할 때에 주변에서 말이 많을 때에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애쓴 것에 대해서 순암이 알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섭섭함을 토로하였다. 순암은 문의 언찰 문제에 대해서 항의하였을 때에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술이나 권하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세자시강원에 벼슬할 때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에는 속으로 소인배들처럼 공치사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나아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마을을 짓쳐들어와 뜰 안에까지 와서 가마에서 내린 무례함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천주교의 예절인가 하고 비난하였다.

순암으로서는 자신과 그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이기양의 아버지 이종한(李宗漢)이 자신을 존장(尊丈)으로 대했으며, 이기양은 자신의 아들인 안경증(安景曾)과 교제하는 사이이고, 이기양도 순암 자신을 스승으로 대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세상이 크게 변하였다고 개탄하였다. 순암 안정복의 하늘과 복암 이기양의 하늘은 다른 하늘이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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