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학산책] 佛家別傳 열일곱 번째 이야기

뉴스24 | 입력 : 2020/12/08 [17:49]

나주 금성산(錦城山) 다보사(多寶寺)와 천진선풍(天眞禪風)의  우화도원(雨華道元)

 

1.나주 금성산(錦城山) 다보사(多寶寺)

다보사(多寶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본사 백양사의 말사로 금성산(錦城山) 동록(東麓) 나주시 경현동 629번지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금성산에서 초옥을 짓고 수행하던 스님이 땅에서 솟아난 칠보로 장식된 큰 탑 속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출현하는 꿈을 꾼 뒤 사찰을 창건했다 하여 사명을 다보사(多寶寺)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이다. 또 다보사는 절 이름이 많을 다(多), 보배 보(寶), 절 사(寺)이어서 많은 보배가 있는 절이라는 말이다. 어떤 보배를 가지고 있어 다보사라 하였는지 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보사에 소장된 지정문화재를 살펴보면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343호 다보사괘불탱, 보물 제1834호 나주 다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좌상이 있고, 지방 문화재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0호 나주 다보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시왕상 일괄과 문화재자료 제87호 다보사대웅전이 있다.

다보사의 성보문화재는 국가지정 문화재로부터 지방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별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러한 다보사의 문화재는 다보사 자체에서 조성한 문화재라기보다는 나주지역 인근 사찰이 폐찰이 되면서 다보사에 옮겨지면서 성보로 봉안된 점이 주목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보물 제1343호로 지정된 다보사괘불탱이 아닐까 한다. 이 괘불탱의 화기에 의하면 다보사괘불탱의 원봉안처는 금성산 보흥사(普興寺)로 기록되어 있다. 보흥사괘불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보사로 옮겨지게 되었고 2002년 7월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 지정 당시 조사자들이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여 그 소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문화재 명칭도 다보사괘불탱으로 정리하였다.

 

2. 다보사의 천진도인(天眞道人) 우화도원(雨華道元)

나주시 경현동 한수제 저수지를 지나 금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다보사로 향하는 길이다. 다보사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면 사찰 경내의 입구에 부도밭이 있다. 그 한 켠에 다보사를 이끈 큰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세워져 있다. 다보사의 천진도인(天眞道人) 우화도원(雨華道元,1903-1976)이 모셔져 있다.

우화대종사비(雨華堂大禪師碑)는 서기 1980년 10월에 後學沙門 東谷一陀 스님이 찬(撰)하고, 나주출신의 일주(一州) 나철호(羅鐵浩) 글씨를 쓰고, 우화도원 큰 스님의 손상좌(孫上座) 회정(回正) 스님이 세운 것이다.

그림1

1. 우화대선사 비와 부도

우화도원(雨華道元,1903-1976)은 법호가 우화요, 도원이 법명이다. 스님들을 일반적으로 법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큰스님의 경우에 존경의 뜻으로 법명을 삼가고 법호를 많이 부르는 경향이 있다. 우화도원 큰스님도 법호인 우화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화 스님은 일생을 오직 천진난만(天眞爛漫) 그대로 아무 것도 꾸밈없이 불심의 세계 속에 안심입명 하신 분이어서,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속된 표현으로 ‘바보스님’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우화스님은 속성이 전주이씨로 아버지는 이규준이고 어머니는 하남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가()俗家)는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全南 潭陽郡 武丁面 成道里)에서 서기 1903년 4월 7일 태어났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영이(穎異)하여 혼자 두어도 울거나 보체는 일이 없고 온종일 묵묵히 그져 앉아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어른들이 모두 이상(異狀)하다고 하였으며 그 모습이 원래 도승(道僧)의 골격(骨格)으로 약간 울룩불룩 하지만 착하고 순하기 비길 데 없이 사람들은 부르기를 부처라고 별명(別名)하였다고 한다. 나이 십오세에 문득 조부모님이 별세하심을 보고 인간세상의 무상(無常)을 크게 느껴 갑자기 출가(出家)하게 되었다.

그는 덕유산(德裕山)에 입산하여 영각사(靈覺寺) 영명화상(靈明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대본찰 해인사 불학강원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섭렵하여 불교교학을 연찬하였다. 이어서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일단대사를 궁구하기 위하여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하여 오대산(五臺山)·묘향산(妙香山)·상원사(上院寺) 등 명산대찰을 순례하였다. 또한 송만공(宋滿空)·혜월(慧月)·방한암(方寒岩)·백용성(白龍城) 등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도(道)를 물었다. 전국의 방방곡곡(坊坊谷谷) 제방(諸方)을 행각(行脚) 하면서 각고정진(刻苦精進) 하였다.

1937년 하안거(夏安居)에 이르러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 입방(入房)했다. 당시 조실(祖室) 운봉화상(雲峰和尙)이 법거량하는 가운데 금일도원정상(日道元頂上)에 우화만지(雨華滿池)로다 하시니 이로부터 우화당(雨華堂)을 법호(法號)하게 되었다.

그는 과묵하고 단순담백하여 천진무사(天眞無私) 하시니 스님의 모슴을 보는 이나 음성을 듣는 이가 누구나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천진불(天眞佛)을 뵈오러 간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림2

2. 우와대선사 비

1945년 광복 이후(光復 以後)로는 나주 금성산 다보사에 주석하며 여생을 보내니 제방의 납자가 운집하였다. 대중을 제접할재 하루는 상당하여 주장자를 붙잡아 들고 말씀하시기를

 

석일(昔日)에 세존(世尊)은 염화시중(拈花示衆) 하시고
금일 산승(山僧)은 주장자를 잡아드니 이 두 가지가 더불어 어떻게 다른가?
하고 한번 내려치며 말씀하시기를
허공 속에 골수(骨髓)가 있다 하니 이것이 무엇인고?
하시고 주장자로 허공을 가리키며 게송(偈頌)을 욾으시되
일지주장타허공(一枝柱杖打虛空)하니 허공타출허공골(虛空打出虛空骨)이로다

 

하시다

 

우화 스님은 평소에 좀처럼 편찮으신 일이 없었다. 1976년 10월에 이르러 시자를 돌아보시며 “금성산에도 해가 저무는구나” 하고 미소를 하시더니 이내 조금 편찮아지셨다. 문도들에게 ‘각자 노력하라’ 하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放下柱杖便臥去하니 江域 5월에 落梅花로다 하시고 돌아 가셨다(歸寂. 세속의 나이로는 74세요, 법랍(法臘, 승려 나이)은 육십이었다.

우화 큰스님 비문을 지은 동곡일타 스님은 게송으로

 

금성산 그림자는 나주를 덮고 다보사 종소리는 영산강에 흘러가네
스님의 크신 도덕 무엇으로 나타내리 한조각 그림자(一片影) 뒷모습을 엿보고져 하노라
무무무(無無無)여 평생을 무자(無字) 밖에 또 있는가 대도(大道)는 무형(無形)이라 본무명상(本無名上)이 아닌가
입차문내하(入此門內下)에는 막존지해(莫存知解) 하시니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으로
무괘애(無罣碍)를 보시(布施) 하옵소서

 

라고 찬탄하였다.

그림3

3. 우화대종사 부도

우화스님은 금성산 다보사에 계시면서 천진면목(天眞面目)으로 출자가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교화하였다. 해방 이후의 다사다난한 시절의 불교 법란기(法亂期)에 천진선풍(天眞禪風)으로 다보사를 이끌어 오신 것으로 이해된다..방편으로 교화한 일화(逸話)가 널리 알려진 것이 많다. 우화 스님의 상좌로 널리 알려진 분은 봉암사 수좌인 적명 스님이 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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