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향토인물사, 삼계면 사람들 (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뉴스24 | 입력 : 2020/08/02 [19:47]

# 전라도 의병들,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1593년 6월29일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창의사) · 최경회 (전라우의병장, 경상우병사) · 고종후(복수의병장, 고경명의 장남) 등이 남강에 몸을 던졌다. 

 

6월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계속된 진주성 제2차 전투는 관군과 의병 6천 명과 왜군 10만 명의 싸움이었다.  

 

1593년 1월에 명나라 이여송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2월12일에 권율이 행주에서 승리한 이후 서울의 왜군은 명군과 조선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왜장 고니시는 명나라 심유경과 회담하여 4월18일에 서울에서 자진 철수했다. 하지만 부산에 모인 10만 명의 왜군은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했다.   

 

이러자 조선군은 의령에서 긴급회의를 한다. 장수들은 명나라의 입장에 따라 진주성을 비우자고 주장했다. 심지어 전라도관찰사 권율과 의병장 곽재우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 · 황진 등은 달랐다. 진주과 호남은 입술과 이빨 관계로,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김천일을 비롯한 전라도 의병 3,500명은 홀로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에는 관군 2,500명과 백성 6만 명이 있었다. 의병과 관군은 부대 편성을 다시 했다. 총대장은 김천일, 순성장은 충청병사 황진이 맡았다. 이들은 고립무원(孤立無援) · 중과부적(衆寡不敵) 상태에서 6월21일부터 6월28일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 황진이 6월28일에 전사했고 후임인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역시 6월29일에 전사하고 만다. 

 

6월29일 오후 3시경에 진주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 최경회 · 고종후 등은 남강에 몸을 던졌다.  

 

진주성 동문 파수장 심우신도 끝까지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남강에  투신했다. 군기시 첨정을 한 김포 출신 심우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인 영광 삼서면(지금은 장성군 삼서면)에 내려와서 의병을 일으켰다. 표의장군 심우신은 양화진에서 김천일을 만나 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김천일이 진주로 남하하자 그도 내려갔다. 

 

심우신을 따라 황간, 독성산성에서 싸운 삼계면 출신 김보원도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아내 이씨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절의록』, p119) 

 

한편 삼계면 수성최씨 세장산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나주 출신 최희립의 초혼 묘가 있다. 그는 집안의 종 수십 명을 데리고 김천일 거의에 참여하여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남강에 몸을 던졌다. 최희립은 영광을 지킨 55명 중 한 사람인 삼계면 출신 최희윤의 동생이다.  (『호남절의록』, p81-82) 

 

▲ 사진 1 수성최씨 세장비   © 뉴스24

▲ 사진 2 최희립 초혼 묘  © 뉴스24




# 정유재란, 호남이 초토화되고 송약선 등이 순절하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중순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재침략하면서 지시를 내린다. 첫째 이순신을 제거한 뒤에 조선 수군을 전멸시킬 것, 둘째 전라도부터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은 물론 양민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조건 참살할 것 등이었다. 

 

왜군은 간첩 요시라를 이용해 이순신을 곤경에 몰아넣는다. 가토를 공격하라고 지시한 선조의 명령을 이순신이 거부하자, 선조는 명령불복종으로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백의종군케 한다.  

 

7월16일에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 해전에서전멸시킨다. 왜군은 곧바로 남원으로 진격한다. 8월16일에 5만 6천 명의 왜군은 남원성에서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 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 명의 조명연합군을 전멸시키고 수 천명의 양민을 학살한다.    

 

이 전투에서 삼계면 출신 무관 송약선(1568∼1597)도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짐에 활시위로 목을 매어 죽었다. 송약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부인 박씨도 순절하였다. 

 

지지당 송흠의 4대손 송약선의 묘비명에는 “지아비(夫)는 임금(君)을 위해 죽고 지어미(婦)는 지아비를 위해 죽었으니 충(忠)과 열(㤠)이 일문(一門)에 남았다.” 고 적혀 있다. 

 

2012년 7월에 송약선은 이복남·신호·이원춘 등 52명이 봉안되어 있는 남원 만인의총 충렬사에 53번째로 봉안되었다. (문화재청 만인의총

관리소 홈페이지 참조)

  

  

▲ 사진 3과 4 만인의총 충렬사에 모셔진 송약선 위패   © 뉴스24


한편 시마즈와 나베시마의 왜군은 9월 중순부터 전라도 전역을 초토화하고 백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일례로 왜군은 9월21일 진현현에서 870개, 9월 27일 영광과 진원에서 10,040개의 코를 베어갔다.   

 

한편 삼계면 출신 노석령은 온 집안이 적에게 함께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아들 노상룡의 아내인 고경명 딸은 적을 꾸짖다가 자결하여 정려(旌閭)되었다. (호남절의록 p 50, 68-69)

  

이희익도 왜적들이 남하하자 집안 종들을 이끌고 대화산 아래에서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죽었다. (호남절의록, p 173 ) 

 

이렇게 전라도는 임진왜란 때는 충절의 고장이었지만, 정유재란 때는 초토화 되었다. 오죽했으면 진원현(지금의 장성군 진원면 일대)이 폐현(廢縣)이 되었을까! 

 

이상으로 「삼계면 사람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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