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향토 인물사, 삼계면 사람들 (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뉴스24 | 입력 : 2020/07/27 [07:28]

# 의곡장 기효증,  의곡을 의주에 보내다.

 

1592년 8월19일에  기효증(1550∼1616)은 박경과 함께 장성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등을 만났다. 7월20일에 김경수는 기효간, 윤진과 함께 장성남문에서 창의했는데 인근 고을 선비들이 호응하였다. 이날 이들은 양곡을 거두고 운반하는 일에 대하여 상의하였는데 조선 성리학의 큰 별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장남인 기효증은 그 자리에서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이 된다. 

 

함재 기효증은 나주에 의곡 도청을 설치하고 격문을 내어 각 고을마다 책임자를 정하고 의곡을 모집하였다. 영광은 이굉중이 의곡도유사로서 동생 이용중, 송약선, 이희룡, 최희윤과 함께 곡식 1,200석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호남절의록』의 <의곡장 기효증 사실>과 <기효증과 함께 모곡한 제공의 사실>에 나와 있다. 

 

9월16일에 영광 법성포에서 의곡을 실은 배 2척이 의주로 출발하였고, 9월21일에 기효증은 나주에서 의곡 배 3척과 함께 출발했다. 서해안을 거치면서 의곡 배들은 점점 늘어났다. <함재근왕록>에 의하면 배는 모두 24척으로 되어 있다. 

 

의곡 배들은 1593년 1월15일 강화도에 도착한 후 의주에는 1월 말경에 도착했다. 기효증은 선조를 뵙고 3,200석의 의곡을 전달했다. 의곡은 나중에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

 

▲ 사진 1 월봉서원 (기대승을 모신 서원)   © 뉴스24


# 55명의 선비들, 영광을 지키다.   

             

1592년 7월 들어서 명군이 참전했지만 평양성 탈환에는 실패하였다.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런데 10월2일에 영광군수 남궁견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했다. 아무리 조선이 ‘충보다 효를 중시한 나라’라지만 호남의 목구멍이고 서해의 요충지인 영광 방어를 젖혀두고 군수가 친상을 당했다고 사직하다니 정말 황당하다.  

 

영광군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영광 백성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고 민심이 흉흉하였다. 체찰사는 이방주를 직무대리로 임명하였으나 불안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광의 지도층들이 자발적으로 향토방위에 나섰다. 10월 18일에 26개 문중, 55명의 선비들이 오성관(筽城館)에서 모였다. 이들은 “영광은 호남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군사의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끊어지고 만다. 죽음으로 우리 성을 지켜내자.”고 결의한다. 그리고 삽혈동맹(歃血同盟 산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심)하며 맹세하기를, “무릇 우리 동맹한 사람들은 맹세한 뒤에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임에서 사매당 이응종이 수성 도별장으로 추대되었고, 방위 체제를 행정부서와 전투부대 24개 부서를 편성하여 55명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참여한 의사(義士) 55명은 도별장 이응종, 부장 강태, 수성장 오귀영, 군정 이굉중 등이었다. 55명 중 삼계면 사람은 모두 8명이다. 참모관 노석령, 대장 군관 이효안, 남수문장 이희익, 중위장 최희윤, 중부장 이희룡, 유군장 김찬원, 서외진장 이효민, 군관 송약선이 그들이다.  

특이한 것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도 장문서(掌文書)로 참여한 점이다. 

 

한편 전남문화재자료 201호 <영광임진수성록>에는 수성일지가 기록되어 있다. 10월18일 이후 55명의 의병들은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밤낮으로 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10월 하순 경에는 민심이 다시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11월3일에는 영남 의병장 곽재우가 군량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격문을 보내와 12월15일에 군량을 곽재우에게 보냈다. 11월6일에 신임 군수 이안계가 도착하였고, 11월7일에 도체찰사 정철의 명령문이 왔다. 이 공문은 분조 광해군의 지시였는데, 관청의 무신들은 비록 친상을 당했을지라도 관직을 그만두고 자리를 뜰 수 없다면서 남궁견을 영광군수로 복직시키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신임 군수는 떠났고, 직무대리 이방주도 돌아갔다. 

 

11월13일에는 도별장 이하 의병들이 오성관에 모였다. 논의결과 이거와 류광형을 모군 별장으로 삼아 의병을 더 많이 모집하도록 하였다. 1593년 2월28일에 군수 남궁견이 복직하자 수성 의병은 마침내 해산하였다. 

 

이로써 영광 수성의병들은 1592년 10월 18일부터 1593년 2월 28까지 무릇 5개월 동안 향토방위 활동을 하였다.  

 

영광 의병들의 수성은 비록 왜군과 전투는 없었으나 수성 조직을 치밀하게 구성하였고, 수성법에 의거 경비를 하여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한 점이 크게 돋보인다. 

 

영광군 영광읍에는 영광 의사 55인의 신위를 모신 영광 임진수성사가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