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향토인물사, 삼계면 사람들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20/07/12 [17:13]

                           # 삼계면(森溪面) 사람들

 

향토사(鄕土史)는 특정 지방에 관한 역사이고, 향토 인물사는 특정 지방 인물에 대한 역사이다. 향토 인물사 ‘삼계면 사람들’을 쓴다. 

 

삼계면(森溪面)은 지금은 장성군 삼계면이다. 본래 백제 근초고왕(361년) 때 소비혜현(所非兮縣)이 설치되었고, 신라 경덕왕 때 삼계현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고려 현종(1018년) 때부터 영광군에 속했다. 그런데 1914년 3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계면은 영광군에서 장성군으로 편입되었고, 사창(社倉 식량 창고) 초등학교가 1920년에 개교하였다. 

(장성군 발행, 장성군 마을사 - 삼계면 편, 1991)

 

조선 시대 초기 삼계면 인물로는 송흠과 송익경 그리고 이윤종이 있다. 이들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  부자(父子) 청백리, 송흠과 송익경

관수정(觀水亭)을 간다. 관수정은 송흠(宋欽 1459∽1547)이 중종 34년(1539년)에 지은 정자이다.

 

  © 뉴스24   관수정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관수정의 마루 앞면에는 송흠의 ‘원운(原韻)’ 시가 붙어 있다.

 

물을 바라보고 우뚝하게 지은 집 여름에도 시원한데

노부(老夫)는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선다.

골짜기는 두 시냇물이 모두 차지하니

어찌 중국 용문의 팔절탄을 부러워하리.

 

송흠의 시 바로 옆엔 제자이며 친척인 면앙 송순의 시가 걸려 있고, 건너편에는 아들 송익경, 김인후, 김안국의 시가 걸려 있으며, 제자 양팽손의 시도 보인다. 이외에도 송흠과 교류한 소세양, 임억령, 오겸 등 당시에 쟁쟁한 인물들의 시가 걸려 있다. 

 

▲ 관수정 정자의 편액들   © 뉴스24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렸다. 지방 수령이 부임할 때는 전임 고을에서 말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세 마리 말만 받았다. 이는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육조, 제가(齊家)편’에 나온다.   

 

송흠이 수령으로 부임할 때마다 신영마(新迎馬)는 세 필 뿐이었으니, 공이 한 필을 타고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을 탔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삼마태수라고 일컬었다.  

 

송흠은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조의 명신(名臣)편’에도 나온다.   

 

송흠,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이요, 본관은 신평(충청도 홍주)이다. ...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耆社 :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행장>

 

송흠의 증조부 송구(宋龜 1379∼1449)는 세종 시절에 형 노송당 송희경과 함께 호남으로 이거하여 송희경은 담양군에, 송구는 영광군 삼계면에 정착하였다.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에서 태어난 송흠은 청백리를 7번이나 하였고, 101세에 별세한 모친을 지극히 봉양하여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라 불린다.

  

한편 송흠의 둘째 아들 낙안 현령 송익경(宋益憬)도 청백리였다. 1538년(중종 33년) 10월 7일 자 「중종실록」, 1551년(명종 5년) 11월 4일 자 「명종실록」에 나온다.

 

1551년 11월 4일 자 「명종실록」을 읽어보자.  

 

삼공이 청간한 사람으로 조사수·주세붕·이황·송익경 등을 초계하다  

 사인(舍人)이 삼공(三公)의 뜻으로 아뢰기를, "청간(淸簡)한 사람을 초계(抄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정2품 이상은 상께서 아실 것이므로 초계하지 않았습니다. 뽑힌 사람은 조사수·주세붕·이준경·김수문·이세장·홍담·성세장·이영·김순·윤춘년·윤부·윤현·김개·이황·송익경·변훈남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송흠의 묘소는 관수정 뒷산에 있다.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는 묘비가 있고, 옆에는 묘갈비가 있다. 묘갈명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 

 

관수정 건너편에는 기영정(耆英亭)이 있다. 1543년 2월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인수는 송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1544년 3월 22일 자 「중종실록」에 나온다.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을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흠은 이 고을 사람이고 정자는 곧 송인수가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이어받아 세운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영광스럽게 해 준 것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이란 편액를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도내(道內)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 병마절도사 이윤종 묘소 

동화면 구림로 35-9에 광산이씨 재실인 가산재(柯山齋)가 있고 뒷산은 세장산(世葬山)이다. 

 

▲ 광산이씨 재실 가산재   © 뉴스24


세장산에는 병마절도사 이윤종(李胤宗 1451∼1533) 묘가 있다. 「연산군일기」 1496년 11월 7일, 「중종실록」 1510년 6월 12일 자 등에 나온다. 묘갈명은 송흠이 153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할 때 지었는데 이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병사·충청수사, 장흥· 장단 · 순천 · 대구 부사 등을 하였다.  말년에 이윤종은 삼계 옛집에 돌아와서 1531년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였고, 1533년에 별세했다. (『지지당 유고』에 수록됨) 나중에 후손인 이희익·이희룡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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