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장성 문협 문학기행문

5월11일 김종용.

뉴스24 | 입력 : 2019/06/11 [19:14]

 

▲     © 뉴스24


장성 문인협회에서는 춘계 문화탐방을 나주와 목포로 정하고 출발이다. 신임 임춘임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장성문인들의 결속과 화합을 위해 다 함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시간을 갖자며 회장본인도 장성문인협회의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의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회장께서는 오늘 탐방은 영산강 줄기 따라 먼저 왕관이 출토된 고분의 유적지와 몇 군데 나주를 보고 그리고 목포문학관을 탐방하는 것으로 안내를 하면서 실은 요즘 뜨고 있는 신안에 천사대교를 먼저 들릴 계획이었으나 오늘 일정관계로 계획에 차질을 갖게 되었음을 사과말씀을 드렸다.

 

우리일행은 영산강을 우측으로 하고 가다보니 첫 번째로 나주에 백호 문학관이 우리를 맞는다. 백호 임재(1549-1583)선생은 3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간 기질이 호방하고 구속받지 않은 혼란했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의 남아 라 불리 워 졌다. 39세로 짧은 생을 마쳤으나 그의 고뇌의 삶을 1천여수의 시와 산문과 소설로 남겨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청초 우거진 골에. 물곡사. 남영소승. 수성지등이 있다. 백호임재 연보를 보면 1549년 나주 회진출생 으로 1583년 평안도 도사로 부임 송도 황진이 무덤을 지나면서 청초 우거진 골에 시조를 남겼다. 1584년 평안도 도사를 마치고 부벽루 상영록을 펴냈다. 1587년 부친상을 당한 2개월 후 물곡사 자만 등 유언을 남기고 8/11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천연염색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은 2006년에 천년의 도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고온다습한 기후를 이용한 전통 쪽 염색을 보존 발전해 나가는 동시에 전국에서 유일한 천연염색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천연 염색이 전통의 공예산업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하나의 부랜드로 발전을 위해서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이곳의 주요행사로는 천연염색. 사방팔방 겔러리. 하천 겔러리. 골목길 겔러리. 미술관장등 천연염색 체험과 작품전시. 공예 체험 등을 펼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나주 복암리에 고분군(사적404호)을 들렸다. 이 주변에 많은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중심세력들이 살았던 근거지로 추정되고 있다. 2006년부터 2018까지 총 7차에 걸친 조사를 통해 고분의 범위와 성격을 규명하고 축조세력의 생활상을 복원해나가고 있었다.


이제 나주에 마한 시대 것으로 보이는 금관을 만나러가자며 찾아왔다. 고대의 미스 테리 나주 반남면 대안리 고분군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모두가 의아해하며 전시관을 찾았다. 반남면 고분군은 대안리 동쪽에 위치한 자미산 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그곳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12기의 3국시대의 고분군으로 본다.


1917-1918년과 1938-1939년 일본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이래 현제까지 12기의 고분이 발견되거나 확인되었다.


마한 토착 세력들의 무덤으로 시기는 4-5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치 점심시간이라 그늘진 곳을 찾았다. 여러 고분들이 여러 기가 눈에 띈다. 주변에는 마치 왕릉 같은 고분들이 여러기가 있었다. 오늘 점심 메뉴가 참으로 진수성찬으로 회원 모두는 회장님 내외분과 총무님들의 수고로움에 감사에 박수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유물전시관을 찾았다. 뭐니 뭐니 해도 먼저 금관 앞에 서서 설명을 들어본다. 그러니까 3국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정교하면서 섬세하게 만들어진 이 금관은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3국 시대 이전으로 추측한다면 마한시대인데 이곳 나주지역의 당시의 수준 높은 생활문화를 머리에 그려본다.

 

옹관역시 대형옹관으로 참으로 당시의 우리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에 머리가 숙여진다. 백제 신라의 왕관들은 여러 번 봐 왔지만 전라도 땅에서 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나주지역 고분군에서 발굴된 왕관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라는 의문을 남기면서 이곳은 3국시대의 것으로 대한민국 사적 51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대형옹관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우리 일행은 역사적 가치가 큰 왕관을 머리에 그리면서 나주에 대한 역사 인물 특산품 그리고 나주고분에 대한 역사의 의미를 뒤로하고 목포 문학관을 찾아 출발이다.


목포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갓 바위를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산기슭에 우측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목포 문학관이 바다를 바라보며 3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4분의 문학인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유품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 먼저 목포출신 박화성(1903-1988) 실을 들렸다. 대표작으로는 백화. 하수도공사. 고향 없는 사람들. 소장되어 있었고 자료로는 : 대표저서 생활 유품 등 1.836점 이 보관되어 있었다.

 

12세로 정명여학교를 졸업 서울 숙명여고를 거쳐 1926년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일본여자대학교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21세때 최초의 단편소설 팔삭동을 발표하고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 문단에 1925년에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네 살에 한글 깨우쳐 성경을 읽고 다섯 살에 한자를 해득하고 신동이라는 평을 받았다. 열한 살에는 유랑의 소녀란 소설을 쓰고 14살에 쓴 식물원 소설은 서울이 배경이 되었다.


단편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하다. 머리가 천재라 일본여자대학에 합격하고 최초 여성 장편소설 백화를 쓰면서 오빠 박재민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 다음으로는 차범석 실을 찾았다. 축구선수 차범석과 동명이라 친근감이 든다. 목포 북교동출신으로 반농반상의 할아버지는 목포개항 때부터 부자가 되어 아들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냈다. 그 당시 목포에는 서점이 둘이 있었는데 차범석은 새로운 책이 들어오면 주문해서 모험 탐정 순정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단편소설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하여 1962년에 국립극단에서 초연으로 화제가 되었고 1963년 연극의 전문화와 대중화를 목표로 산하를 창단한다. 그는 연극행정가로서 활동하며 무용극으로 도미부인, 파도, 고려애가, 오페라 산불 등을 내놓았다.
* 다음은 세 번째로 김현 실을 찾았다. 본명은 김광남 본관은 경주요. 전남 진도 출신이다. 그분의 학창시절은 1960년 경복 고등학교 1964년 서울대학 불문학과 졸업 1990년 죽기 전까지 서울대학 불문과 교수를 지냈다. 대학 재학시절 1962년 자유문학에 평론으로 시작하여 산문시대.


사계. 68문학. 문학과 지성 등 1980년에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 1990년에 이르는 많은 한국문학에 관한 8권의 평론집이 보여주듯이 비평분야에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으로 1990년 팔봉문학상을 받았다. 이제 마지막 4번째 들린 곳은 장성태생으로 그의 생애 희비의 쌍곡선을 남겨 세상에 큰 파장을 남겼던 김우진씨 그는 누구인가? 출생지는 바로 장성군 북삼면 용강리 별관 터이다.


지금은 별관리는 땜 자리 바로 아래 있었던 마을로서 지금은 장성 땜 자리 근처였기에 흔적도 없어 졌다. 


그러니까 현제 주소로는 북삼면 별관리 속한 지역이다. 본인이 어려서 어른들에게 들었던 바로는 김우진씨 부친이 장성군수 시절 궁궐 같은 큰 기와집이 6-7 채 정도 들어서 있었다. 그 후 김성규씨 가족이 전부 목포로 이거하고 없었다. 주인 없는 큰 기와집들은 해방 후 6.25동란을 거치면서 전부 소개 당하고 빈터만 남게 되었다.


김우진씨 부친 김성규 (1819-1938)씨에 대한 경력은 충북연풍 현감 김병욱과 셋째 부인사이 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서울로 유학 신문학을 수학했다. 토지에 관심이 많았다. 1887년 28세 때 이미 이름이 나라에 알려졌고 5개국 대사관의 서기관 고창현감 장성군수 무안항 감리 강원도 순찰사등 여러 관리를 거쳤다. 무안항 감리시절 목포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한 조사 시에도 일본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조선인을 옹호 하였다. 아들 김우진은 아버지를 정력적인 천재라고 표현하였다.


그럼 김우진의 양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1901. 호남선 우의숙(장성군 소재)에서 모친 순천박씨 사망)
1908. 장성군 북삼면 별관리출생(현제 땜 자리 바로 아래로 50m 지점)
1910. 목포 공립보통학교 2회 졸업.
1913. 목포 공립상업고등과 11회 수료.
1914. 일본 구마모도 농업학교 입학위해 일본감..
1915. 일본 구마모도 농업학교 입학.
1916. 곡성 정운남 딸과 혼인.
1918. 장녀 진길 출생.  구마모도 농업학교 수료.
      졸업생 성적 우수자로 선정 영친왕으로 부터 5원 상금수상.
1919. 와세다 대학 예과 입학. 시(아버지께) 창작수상.
      시(사람들)창작. 평론(노래, 몇낫) 집필. 자유와 자연의 독자 창작.
      희곡(두둑히. 시인의 환멸) 창작(학조) 시(잠결. 고뇌. 일문. 실망.
      한가지의 기쁨) 희곡(난파)창작 평론(우리시 사극 운동의 첫길)
1924. 3월에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하여 부친이 가문의 토지와 재산관리 위해 설립한 삼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 하였다. 회사운영에도 분주했지만 희곡 창작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출가하기 1년전 장남 김방한(1925-2002) 전 서울대 언어학과교수가 태어났다. 그 후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현해탄의 투신은 평론가들은 김우진과 윤심덕은 1926년 일본에서 귀국하던 중 망망대해에서 함께 공해상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당시에 김우진은 작가로서 윤심덕은 소프라노 가수로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로서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 되고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일제 강점기 인텔리 유학생들로 귀국길에 현해탄에서 동반자살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 김우진과 쏘프라노 윤심덕은 1925년 8월 관부연락선에서 조선으로 오던 중 동반자살은 한편의 소설이나 영화로 거듭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볼만큼 큰 사건이요 소설 같은 실화였다.

 

당시 홍남파도 윤심덕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으나 김우진과 사랑에 빠진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현대극작가 김우진의 비극적인 사랑 미스테리 사의찬미는 사실에 근거한 성악가 윤심덕의 자살이유는? 1926년 8월4일 일본 시모노세기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이 쓰스미섬 옆을 지날 때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장을 한 여자와 신사가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몸을 던졌다.

 

바로 윤심덕과 김우진이었다. 윤심덕은 한국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대중가수로 1920년대 신여성 대표인물이다. 김우진은 신극운동을 하던 전라도 거부의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1897년 동갑내기였지만 윤심덕은 미혼이었고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이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동반 자살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소식은 한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인 스켄들로 회자되었다.


평양출신 윤심덕은 가난하지만 기독교신자인 부모덕에 신식교육을 받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성이 뛰어났던 그는 일본총독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 도-교 음악학교 최초의 조선 김우진을 만났다. 당시 김우진은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두 사람은 조선에서 두 달여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윤심덕이 일본 릿도 회사에서 음반취입 연락을 받고 녹음하면서 한곡 더 신의 찬미란 곡을 녹음하고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라고 전보를 보냈다. 테이프는 불이 나게 팔렸고 10만장 판매기록을 세웠다. 1991년 김호선 감독이 이들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의찬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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