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칼럼] 청백리 송흠과 연산군 시대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9/02/0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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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5년 (연산군 1년) 6월29일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표연말 ·전한(典翰) 김수동 · 부응교 홍한 · 부교리 권오복과 성희안 ·  부수찬 손주와 이과· 박사 이관· 저작(著作) 송흠(宋欽) · 정자 권민수와 성중엄 등이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방금 대간을 해직시켜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는 명령을 듣고 놀라움을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의 뜻은, 한 번 어명을 받게 되면 다시 다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옛날 순(舜)임금의 말에 ‘네가 나를 대할 적에는 옳다[面從]하고, 물러가서 뒷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윤탕로의 일이 옳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어명을 받는다면 이는 면종(面從)하는 것이요, 받고서 다시 말이 있으면 이는 물러가서 뒷말이 있는 것입니다. 대간이 굳이 거역하고 받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간이 간언한 일을 가지고 죄를 주신다면, 사람마다 자기 몸을 아낄 줄 아는데, 누가 전하를 위하여 다 말씀드리려 하겠습니까. 신들은 결코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 3번 째 기사)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때  송흠은 홍문관 저작(정8품)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홍문관은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 각종 문서의 작성)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서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런 자리에 송흠은 성종시절부터 줄곧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494년 12월24일에 ‘도학군주’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이 붕어했다. 이로써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연산군은 즉위하기도 전에 삼사(三司)와 충돌이 일어났다. 수륙재(水陸齋) 실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이후 삼사는 외척 등용과 비리에 대하여도 문제를 제기했다. 1495년 2월 11일에 연산군이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하자 삼사는 반대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대간들은 합세하여 몇 달 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지만 연산군은 막무가내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4월28일, 5월28일)

 

연산군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이들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이철견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이철견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여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아울러 외척의 잘못된 행실을 처벌해야 한다는 삼사의 주청도 잇달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 비 정현왕후의 동생 윤탕로였다.  삼사는 1495년 4월10일에  훈련원 부정(종3품) 윤탕로를  성종의 졸곡을 마치기도 전에 기생집에 출입하여 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탄핵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윤탕로를 감쌌고, 윤탕로의 탄핵은 석 달 넘게 계속되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6월29일에 윤탕로를 사면한다는 단자(單子)를 네 번이나 내려 보냈는데도 이를 따르지 않은 대간을 의금부에 회부하여 국문하라고 전교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 29일 1번째 기사)

 

즉시 홍문관 관원들이 대간을 처벌하지 말라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은 것이다. 표연말, 송흠 등 홍문관 관원들은 또 아뢰었다. 

 

"성종시절에는 간언하다가 견책을 입은 자가 없었으므로 26년 사이에 모두 할 말을 다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한 가지 일도 대간의 말을 쾌히 들어줌이 없고, 감옥에 가두어 강직한 선비들의  기운을 꺾기까지 하시니, 신들이 깊이 걱정됩니다. 이야말로 종묘사직의 안위(安危)와 관계되는 것이니,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이는 간언한 일 때문에 국문하라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거역한 까닭이다. 무엇이 사직의 안위에 관계됨이 있겠느냐."
 
표연말, 송흠 등 홍문관 관원들은 세 번째로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예는 어찌 순종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간을 예우하지 않고 한 번만 다투는 일이 있어도 명령을 거역한다 하여 견책을 내리신다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아첨만을 일삼아서 앞으로 국사가  구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신들이 이른바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있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전하는 신들의 말을 귀에 거슬린다 여기지 마시고, 깊이 생각해 보소서."

 

연산군은 다시  전교하였다. 

"옛날 임금은 어질기 때문에 이와 같았지만, 나는 어질지 못하니 당연히 추국해서 죄주어야겠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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