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칼럼]10월26일 회상(回想)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뉴스24 | 입력 : 2018/11/0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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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1917~1979) 대통령,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것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소니 퀸의 춤은 명품이었다.  

 

세 사람은 국적도 한국, 일본, 그리스이어서  공통점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통점은 ‘사망일이 10월26일’이라는 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했다. 그의 서거로 5.16 혁명이후 18년간의 집권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12.12 사태로 민주화의 길은 멀어지고 말았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경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다.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멈췄다. 곧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라 25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토는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린 안중근은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브라우닝 권총을 쏘았다. 제1탄은 이토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제2탄은 흉부를 맞췄다. 3탄이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안중근은 저격 후 당황한 빛 없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코레아 우라!’
(‘대한국 만세’의 러시아어)를 3회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토는 열차 내 객실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15분 만에 죽었다.  

 

10월30일에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검찰관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당당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은 죄 등 15가지 이유를 댔다.

 

안 의사의 공판은 1910년 2월7일부터 2월14일까지 6번으로 끝났다. 2월14일에 선고가 있었다. 재판장은 이 사건을 ‘이토 암살사건’이라 칭하고 안중근을 흉한(兇漢 : 테러리스트)으로 몰아 일본 형법의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1910년 3월26일에 뤼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 의거에 중국의 양계초는 ‘가을바람이 부니 이토를 단죄하네.(秋風斷藤曲)’란 시를 지어 안중근을 찬양했다. 손문도 찬시를 지었다.
 
한편 니체와 붓다와 조르바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자 인간 예수를  그렸다.

 

그러나 예수가 아내를 거느린 것이 문제가 되어 1953년에 그리스 정교회는 출간을 막았고, 1954년에 로마 교황청은 금서 목록에 올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그는 1957년 10월26일 독일에서 죽었다.

 

그런데 시신이 그리스 아테네에 운구 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신성 모독을  이유로 아테네의 공동묘지에 안치를 거부하였다. 별 수 없이 그는 고향 크레타 섬에 묻혔다. 그의 묘에는 그가 미리 써놓은 묘비명이 쓸쓸히 그를 지키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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