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 위의 호남 선비 -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기사입력 2018/02/27 [07:33]

[칼럼] 길 위의 호남 선비 -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 입력 : 2018/02/27 [07:33]

 오우가(五友歌)비 안내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윤선도(1587∼    1671)는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었고, 20년간 귀양생활을 했으며 19년간은 벼슬을 내놓고 자연 속에서 살았다’는 글귀이다.
 

▲     © 뉴스24



그랬다. 윤선도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세 번의 유배생활을 했다. 첫 번째 유배는 1617년이었다. 윤선도는 나이 30세인 1616년(광해군 8년) 12월에 벼슬도 없는 진사 신분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신 이이첨의 횡포를 규탄하고, 영의정 박승종과 광해군의 처남 유휘분이 허수아비처럼 이이첨을 묵인하고 있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국정에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최고 실세를 건드렸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다행히도 참형만은 피하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갔다. 이어서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었는데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유배가 풀려났다.  

 

1628년 42세의 윤선도는 문과 급제하여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3남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예조정랑을 겸했다. 그런데 모함을 받아 1635년에 성산현감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윤선도는 가솔들을 모아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갔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제주도로 가다가 완도 보길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터를 잡았다. 그런데 윤선도는 강화도까지 와서 인조를 알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1638년에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 갔다. 두 번째 유배였다. 윤선도는 1639년 2월에 유배가 풀려 해남에 돌아왔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은둔생활을 한다. 1640년에는 해남군  현산면에 있는 수정동 · 문수동 · 금쇄동을 발견하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지냈다. 1642년 56세에 고산은 산중신곡 18수를 지었다. 이 18수에는 오우가 6수가 포함되어 있다. 오우가는 윤선도가 추악한 세상에서 쓰라린 고초를 겪고 난 후에 수 · 석 · 송 · 죽 · 월 다섯 벗만이 언제나 변함없는 친구임을 깨달은 시조이다. 마냥 음풍농월(吟風弄月)은 아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했다. 윤선도는 등극을 축하하면서 기축소를 올렸다. 효종은 ‘상경하라면서 당언(讜言 올곧은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사헌부는 윤선도의 병자호란의 죄목을 다시 들먹이면서 윤선도를 국문하라고 효종에게 상소했다.

그는 다시 보길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호미학의 절창인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다. 우리가 지금 윤선도를 기억하는 것은 한글로 된 ‘오우가’와 ‘어부사시사’ 때문이리라. 
 
드디어 1652년(효종 3년) 1월, 효종은 66세의 윤선도를 성균관 사예로 임명하고 상경토록 했다. 17년만의 상경이고, 효종과는 20년만의 상봉이었다. 이윽고 고산은 동부승지 · 예조참의가 되었지만 서인의 견제를 받아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한편 1659년에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차남이므로 1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과 임금은 3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 맞섰다. 그러나  이제 막 부임한 현종은 집권당 서인 편을 들어야 했다. 윤선도는 송시열을 비난하면서 3년 복을 주장했지만 이것이 정치탄압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1년)에 고산은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갔다.

 

이어서 1665년에 광양으로 이배되었고 1667년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나이 81세였다. 이후 고산은  완도 보길도에서 4년을 더 살다가 1671년에 낙서재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5세였다.

윤선도의 일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30대 초반의 정치역정을 유배로 시작했고  마지막 여정도 유배로 끝났다. 우연히도 1616년에 처음 귀양기간도 7년이었고, 말년의 유배기간도 7년이었다.   

1669년에  83세의 고산은 완도 보길도 세연정에서 동하각(仝何閣)이라는 시를 쓴다. 

내 어찌 세상을 거스를 수 있으랴
세상이 나의 뜻과  어긋난 것이지
높은 지위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녹야에서 살면서 법도를 따르리.

我豈能違世
世方與我違
號非中書位
居以綠野規  1)

고산(孤山) 윤선도. 그의 일생은 그의 호처럼 외로운 큰 산이었다. 세상과의 불화(不和), 그는 격정의 삶을 산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사진  고산 선생 존영

1) 중서(中書)는 고려시대 종1품 벼슬인 주서령을 말하며 높은 관직을 가리킨다. 녹야(綠野)는 당나라의 배도(裵度)가 낙양 남쪽에 마련한 별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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